영어 울렁증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영어를 조금 잘했었다.
그럼에도 항상 영어 울렁증이 있어 남들 앞에서는 영어를 잘 못하고 특히 스피킹은 잼병이었는데 그 이유는 항상 나보다 잘하는 애들과 한 반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다닌 영어학원에서 나는 항상 내가 중위권에 있는 반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해외 경험이 많은 애들이 꽤 있는 외고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물론 주변 애들이 잘한 것 맞았지만) 나는 분명 필요 이상으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운 좋게 내가 상위권에 속하는 반에 배치되면서 자신감을 많이 찾았었다.
내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잘했다 보니 친구들이 나한테 의지하고 물어보는 상황에서 뭔가 점점 자신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스피킹 실력도 늘었다.

그러다가 졸엄 즈음 듣게 된 영어교양수업에서는 또다시 리얼 해외파들 속에서 허덕이며 기껏 찾아놓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ㅜㅜ
 
 

'완벽'을 포기하면 편하다 좋다

그리고 나이가 더 먹은 지금은 그냥.. 포기한 것 같다.
옛날에는 '잘하고 싶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오히려 더 못하게 됐다면, 이제는 '못하는 나를 그냥 받아들이자, 어떡할건데, 뭐'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나.

그러다가 스위스에 유학을 온 지금, 솔직히 내가 듣는 대화 중 85~90% 정도만 알아듣는 것 같다.
심지어는 똑같은 문장을 "sorry?"하며 서너 번 물어본 적도 있다.
그치만 그래도 예전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 옛날 같았으면 분명 물어보기 좀 그래서 대충 알아듣는 척 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괜한 오해 만들기 싫어서라도 그냥 철판 깔고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스피킹도 솔직히 좀 처참하다.
내가 하는 말을 애들이 못 알아먹거나 잘못 알아먹을 때가 좀 있다. 아마 한국인 악센트 때문이겠지.
그래서 (티 안 내려고 했지만) 되게 민망했던 적도 있다 ㅠㅠ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그냥 빈 말일 수도 있지만 플랫친구들은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준다는 것이다.
자타공인 내가 우리 플랫 9명 중에 영어 꼴찌인데도..^^
심지어 플랫메이트 중 유일한 영어 원어민인 다니엘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다니엘은 개인적으로 플랫친구들 중 내 영어 실력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애들은 다 유럽 애들이다 보니 알파벳도 같고 영어에 많이 노출되어 있어 영어를 잘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한다.
반면 나는 알파벳부터 완전 다른 언어를 이만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ㅠㅠ
그래서 내가 제일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자신감이 뿜뿜 차오른다.

그리고 옛날에는 영어가 평가의 대상이자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대화의 수단이라고 할까나.
물론 솔직히 다 이해를 못하니 그 대화라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많다..ㅜㅜ
그치만 그래도 옛날만큼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는다.
그냥 '나 영어 못한다, 근데 뭐 어떡해, 난 외국인인 걸?' 하면서 적당히 욕심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게 오히려 스피킹에는 득인 것 같다.
 

 

 

많이 사용하면 는다

내 기준 굉장히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마르따는, 자기 역시 영어를 잘 못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하며 많이 늘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워낙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보니, 그만큼 빨리 늘은 것 같다고 했다.
이 말도 참 위로가 되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아직 잘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던 거지!
혹은 더 정확히는, 그만큼 내가 영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위스에 온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 돌아보니, 확실히 처음 왔을 때보다는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긴장되고 어렵지만 그래도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빨리 말하는 게 잘하는 게 아니다

나는 솔직히 "영어를 빨리 말함 = 영어 잘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애들에 비해 엄청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이라 나도 영어를 좀 스피드 있게 구사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오히려 천천히 말하면서 실수를 줄여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르따의 영어에 대해 살짝 일침을 가했는데, 마르따는 정말 말이 많고 빠른 사람이라 영어도 엄청 속사포처럼 말하는데, 다니엘 말로는 스페인 악센트가 있고 거기다 말도 빨리 하다 보니 비문도 많아서 자기도 못 알아 먹을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이건 좀 위안이었던 게, 나는 종종 마르따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내가 이렇게 듣기도 못하는구나ㅠㅠ' 할 때가 있었는데, 원어민인 다니엘도 못 알아먹는다 하니 완전 나만의 잘못은 아닌 것 ㅎㅎ..)

실제 다니엘은 영어도 굉장히 천천히 하는 편이다. 독특한 스콧티쉬 악센트와 워낙 느린 영어 때문에 처음에는 비영어권 출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니엘이 천천히 말한다고 해서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같은 영알못 빼고^^..)

그리고 다니엘이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한 사람이 난디타였는데, 난디타는 인도에서 온 여자애인데 내가 들어도 참 깔끔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렇다고 난디타가 엄청 빠르게 말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결국 영어 스피킹 속도와 영어 실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스피킹은 즉흥적인 성격을 띠다 보니 확실히 라이팅에 비해 실수할 때가 많다.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도, 단어는 아는데 정확한 발음을 모를 때도, 혹은 문법적으로 부사를 써야 하는 건지 형용사를 써야 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비슷한 단어 중에 어떤 단어가 더 적합한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그냥 뱉고 물어본다. "이거 맞니?"하고.

계속 다니엘 얘기를 하는데, 다니엘은 독일어를 좀 할 줄 알고 강의도 독일어로 듣고 있다.
그래서 자기도 독일어 원어민들한테 자기가 실수하면 알려달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끔 영어로 말하다 렉 걸리면, 내가 제대로 된 문장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바른 표현을 알려준다.

그럴 때면 너무 좋다. 이렇게 모르는 것에 부딪치면서 하나하나씩 더 배워나가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너무 심각하게 렉 걸리니까 괜히 애꿎은 다니엘에게 "너가 한국어 좀 배워!"라고 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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