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대학 2년차가 적는 한국과 스위스 대학의 비교.
취리히 대학교를 기준으로 적지만, 아마 많은 부분에서 독일 대학과 스위스 대학은 유사할 것이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강의 형식
1. Vorlesung: 교수가 특정 주제에 대해 이론적 내용을 전달하는 전통적인 강의 형식
한국에서 듣는 강의와 가장 비슷한 형태이다.
보통은 출석 체크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에 안 간다.
스위스 친구인 얀이 어느날 웬일로 낮에 기숙사에 있길래 수업 없냐고 물었더니
교수님 영어 발음이 너무 별로여서 수업 안 듣는다고 했다..
2. Vorlesung mit integrierter Übung: 이론 강의(Vorlesung)와 이를 실제로 적용하고 연습하는 활동(Übung)이 결합된 수업 형태
교수님의 강의(Vorlesung)을 통해 이론적인 내용을 설명하면,
Lab이라 불리는 Übung 시간에 조교들이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설명해주거나, 실제 문제를 풀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어, 통계학 수업을 들으면 교수님은 여러 개념들을 알려주고, Lab 시간에는 R 사용법을 배우거나 통계 문제 풀이를 한다.
내가 듣는 대다수의 강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Praktikum: 이론을 실제로 적용해보는 수업 형태로, 실험, 현장 활동, 프로젝트 등이 포함
실습 과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수강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싶다.
4. Seminar: 학생들이 특정 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토론하는 소규모 수업 형태. 학생들의 참여와 발표가 중심이 됨.
한 강의의 규모는 6명에서 30명 정도이다. 정말 소규모로 진행되고, 개인 혹은 2-3명이 팀을 이뤄 발표를 한다.
그 발표에 대해 토의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수업이다.
여기서는 출석이 의무이다. 아직까지 들어본 적은 없지만, 졸업을 위해서는 1개 이상 들어야 한다.
수강신청
세미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강의들은 인원 제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처럼 오전 9시 혹은 10시 땡!하고 광클할 필요가 없다.
보통 개강 한 달 전부터 수강신청이 시작되고, 개강 후 3주까지 정정이 가능하다.
그러면 인원제한이 있는 세미나는 선착순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학과마다 다른 정책이 있지만, 보통은 졸업이 가까우며 한번도 세미나를 듣지 않은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준다.
그리고 어떤 과목들은 간단한 이력서(CV)를 제출해야 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인원 제한이 없다는 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안겨줬는데,
내가 들었던 Informatics 1이라는 필수강의는 한 학기에 수강생이 500명이 넘었다...
그러면 500명이 어떻게 한 강의실에 들어가지? 라는 의문점이 생길 텐데 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온라인 스트리밍 / 팟캐스트
일단 강의실 좌석수보다 학생수가 더 많은 경우, 강의실 2개가 배정된다.
그리고 한쪽 강의실에서는 실제 강의가 이뤄지고, 다른 강의실에서는 실시간으로 중계를 해준다. ㅇㅅㅇ!
한쪽 화면에는 강의실 카메라가, 다른 한쪽 화면에는 강의 자료가 송출되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데 어려움은 없다.
현강을 더 선호할 것 같지만, 의외로 붐비고 산만한 분위기가 싫다고 스트리밍 강의실로 오는 학생들도 꽤 있다.
나는 둘다 참여해 봤는데, 확실히 질문을 할 게 아닌 이상 스트리밍 강의실이 쾌적해서 더 좋았다.
심지어는 아예 줌으로 스트리밍 해주는 경우도 있다.
즉,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도 강의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교수님마다 학과마다 다르지만, 많은 강의에서 강의 녹화본(팟캐스트)을 제공한다.
이건 진짜 나에게 너무나 혁신적이었다...
교수님에 따라 1주만 볼 수 있게 하는 경우도 있고, 상시로 볼 수 있게 하는 경우도 있고, 작년 강의를 오픈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녹강이 주는 단점은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하는 질문은 마이크가 없기 때문에 안 들린다.
그런데 한 센스 있는 미국인 교수님은, 팟캐스트로만 수업 듣는 학생들을 위해 질문이 들어오면 질문도 반복해주신다.
진짜 센수쟁이...
출석체크
앞서 말했듯, 세미나를 제외한 강의들은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다.
강의에 오든 안 오든 그것은 학생 개인의 선택이다. 성적으로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출석은 필수 중 필수였던 한국에서 온 나한테는 정말 충격적이고 참 좋은.. 시스템이었다 :)
심지어 온라인 수강에 어려움이 없도록 빠방하게 지원된다는 점이 참 좋았다.
그리고 현강에 안 가면 교수님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교수님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참여를 유도하는 강의 분위기
강의는 한국에 비해 굉장히 자유롭고 오픈되어 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싶은 학생들은 손을 든다.
그런데 답을 정말 잘 아는 우등생만 손을 드는 게 아니다. 오답을 말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을 창피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학문의 장'이라는 느낌이 확 온다.
이 점은 정말 좋다.
또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사고할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강의에서는 여러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에 대해 배우는데,
미리 강의자료를 읽어오도록 하고 강의시간에는 핵심만 짚고 넘어가는 Flipped learning을 했다.
그리고 강의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옆에 앉은 사람끼리 삼삼오오 짝을 이뤄 간단한 과제를 배운 모델을 적용해 풀어보게끔 한다.
디자인에 대해 배울 때는 교수님이 레고 블럭까지 들고 오셨다.
또, 미시경제학 강의에서는 교수님이 전체 학생들에게 퀴즈를 냈다.
모든 학생이 0부터 100까지의 숫자 중 하나를 골라, 전체 학생들이 고른 숫자의 평균 * 0.6에 가장 가까운 답을 제출한 사람에게 학생식당 바우처를 줬다.
(게임이론에 의해, 모든 플레이어가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정답은 0이 되어야 한다)
강의가 마치면 학생들은 박수를 치지 않고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긴다.
이건 독일 대학과 같다.
절대평가
모든 강의는 절대평가이다.
한국은 아마 35%까지 등 각 학점마다 인원수 제한이 있는 상대평가가 대다수인 걸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평가라고 하면 '아니, 엄청 좋은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차라리 상대평가가 나은 것 같다...
아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위스 대학에서는 학점이 더 세분화된다.
그러다보니 상위 30% 정도에만 들면 되는 상대평가보다 더 힘들다.
다만 장점은 상대평가이다 보니 학생들이 쓸데없는 견제 없이 서로의 학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이런 '경쟁'보다 '자기개발'에 초점을 맞춘 것이 참 좋다. 한국에도 이런 제도가 정착되었으면..
학사 & 시험준비 기간
봄학기와 가을학기로 구분되는데,
봄학기 수업은 2월 3주 ~ 5월 5주이고, 가을학기 수업은 9월 3주 ~ 12월 5주이다.
그러면 여름방학이 3개월?? 아니다ㅠㅠ
수업이 마친 후 2~4주 정도의 시험준비 기간이 주어진다.
즉, 보통 6월 중하순과 1월 중하순에 마지막 시험이 끝난다.
참고로 독일 학사기간보다 1개월 정도씩 빠르다.
심지어 취리히 연방공대(ETH)는 봄학기 기말고사가 8월에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1-2주 정도 짧은 방학을 가진 뒤, 방학 없이 기말고사를 준비한다...
기말고사
1. 기말고사 한 방
이건 케바케이긴 하다. 하지만 보통 많은 강의들이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는다.
대신 과제 20% 기말고사 80%이거나,
기말고사 100%이지만 과제를 50% 이상 제출해야 기말고사를 치를 수 있거나
과제를 어느 정도 이상 제출하면 기말고사 성적에 가산점을 준다.
물론 이런 것도 없이 그냥 기말 100%인 과목들도 많다.
2. 자유로운 분위기
한국에 비하면 훨씬 덜 엄숙하고, 더 자유롭다.
예를 들면 시험 중 음식을 먹거나 음료수를 마셔도 된다.
오래 걸리는 시험은 3시간까지도 걸리기 때문에, 나도 항상 바나나나 초콜렛바를 들고 간다.
중간에 TA에게 말하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도 있다.
또 시험 중간에 누가 재채기를 했는데 다른 학생이 "Gesundheit (영어의 Bless you)"라고 말해서 빵 터졌다.. ㅋㅋㅋ
3. BYOD (Bring Your Own Device)
이거는 모든 강의가 그런 건 아니다.
각자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노트북으로 시험을 본다. 꼭 코딩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이 있다.
4. 커닝페이퍼, 오픈북
많은 강의들이 커닝페이퍼를 허용한다.
보통 A4용지 한 장, 혹은 두 장이며 앞뒤로 사용할 수 있다.
교수님에 따라 물리적인 펜에 의한 자필만 허용하거나, 태블릿을 이용한 자필까지 허용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경우가 있다.
완전 오픈북 시험을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강의에서는 위에서 말한 BYOD 시험이었는데, 아예 전체 강의 자료 PDF가 시험 시스템 안에 탑재되어 있었다.
또 다른 강의에서는 챗GPT와 메신저를 제외한 모든 구글 검색 등을 허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커닝페이퍼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오, 대박, 공부 덜해도 되겠다'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커닝페이퍼를 허용한다는 게, 커닝페이퍼를 통해 풀 수 있는 문제가 없다는 것...
재수강과 퇴학
대다수의 강의들은 2번까지 수강이 가능하다.
그리고 여러 필수과목들이 많은데, 이 필수과목들 역시 2번까지만 수강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2번 다 떨어진다면? 퇴학이다.
진짜 그냥 퇴학이다...
스위스 대학들은 정말 입학에서 친절한 대신 졸업에서 깐깐하다.
자세한 건 다음 포스팅 참고.
여러모로 한국 대학에 비교하면 스위스 대학은 많이 다르다.
이 다름이 처음에는 어려움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배움'의 측면에 있어서는 한국 대학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 느낀다.
한국에서도 몇몇 교수님들은 정말 이런 느낌의 강의운영을 하시곤 했지만,
대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을 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교육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여기에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는 현상은 스위스에서도 이미 발생하고 있고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대학이 어떻게 학문의 장으로서 기능하는가에 대해서는 한국대학에서도 변화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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