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밥을 먹다가 우연히 상 위에 놓인 신문에서 오피니언을 하나 읽게 됐다.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기도 하고 공감도 많이 가서 스크랩한다.
나도 일어일문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일본 문화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상당히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점들이 있고 그중에는 분명히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점들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었다.
특히나 요즘 같이 외래어가 필요 이상으로 난무하는 때에, 편리성을 고려하면서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우리말에는 과학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말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하는 학문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의미의 ‘과학’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겼는가 알아보면, 니시 아마네(西周)라는 일본의 교육자가 1874년에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한다. 영어의 ‘Science’나 독일어의 ‘Wissenschaft’ 등의 서양 말을 번역하기가 참 난감했을 것이다. 니시가 그것을 과학(科學)이라 한 것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한 것이다. 온 세상에 대한 진리를 말하려 하는 동양의 전통적 학문과는 달리, 각 과(분야)마다 특수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학문이 과학이다. 과학 연구는 각 전문분야 특유의 ‘패러다임’에 기반한다는, 90년 후에 나온 쿤(Kuhn)의 과학철학 이론을 니시가 이미 예견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니시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후 일본에 돌아와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일본사회를 현대화하고자 하는 계몽사상을 펼쳤다. 그의 동지들은 서양에서 배워온 수많은 개념들을 동양적으로 소화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내용은 2018년 월간중앙 8월호에 최치현 교수가 게재한 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니시는 과학뿐 아니라 철학, 예술, 이성, 기술이라는 말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니시의 동료 후쿠자와 유키치도 민주, 문명, 권리, 사회 등 현대인의 삶에 기초가 되는 여러 단어들을 고안하였다.
원래 우리말에는 없었던 ‘과학’
일본인들이 해낸 번역의 통찰력
외국 문화를 자기 것으로 소화
소리만 옮기는 게으름을 버려야
그러한 신조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소한 외국어의 의미를 이리저리 깊고 넓게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 의미를 한자에 담겨있는 동양적 개념을 통하여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힘겨운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한 예로, 후쿠자와는 일본에 전혀 없던 ‘Democracy’라는 개념을 처음에는 ‘하극상’으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민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의 선구자들이 고심해서 지어낸 말들을 우리 한국인들은 그 기원도 모르고 워낙 있던 우리말인 것처럼 착각하며 쓴다. 게다가 섬칫한 것은, 그 메이지 시대 일본의 계몽 사상은 결국 우리를 짓밟게 한 군국주의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일본의 지식인들이 이렇게 애를 써서 서양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소화해 내었다는 것은 존경할 만하다. 그러한 전통이 있었기에 서양식의 과학도 일찍부터 제대로 배워서 하게 되었다. 일본은 노벨상을 여럿 받았는데 왜 우리는 없냐고 많이들 묻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새는 일본도 그렇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서 들여온 개념을 우리 것으로 소화해내려는 노력이 없는 듯 하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맡겼다면 과학도 그냥 ‘사이언스’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얼마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한국 신문을 보면서 의아했던 적이 있다. ‘열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뜻을 알 수 없었다. 생선 옥돔이나 참돔은 아는데 열돔이라? 머리를 좀 굴려보니 영어로 ‘Heat dome’이라 하는 것을 반쪽만 번역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컴퓨터, 프로그램, 인터넷 이런 말들은 이제 거의 우리 말처럼 되어버렸지만, 처음에 들어왔을 때 번역을 시도해 볼 수 없었을까. 시도했다면 정말 인터넷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어르신들께 ‘소셜미디어’가 뭔지 설명을 드리고자 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젊은이들은 그것이 없으면 사회생활이 전혀 되지 않을 정도인데 노인들은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감각도 없으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새로 나오는 물건과 현상들이 뭔지를 제대로 표현하는 우리말이라도 있다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미 있는 좋은 번역어를 외면하고 영어를 소리만 내어 쓰는 풍조이다. 다른 나라와 협정하여 백신을 주고받는 일을 ‘스와프’라 해야 하나. 또 생각해 보면 예방주사라는 좋은 말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백신’이 되었을까. 사진을 잘 찍어 보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디지털 카메라의 올바른 배터리 관리법’에 대한 조언이 나온다. ‘디지털’과 ‘카메라’는 이제 포기한다 해도, ‘전지’라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왜 ‘배터리’를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전기가 샘솟는 연못이라는 전지(電池)는 얼마나 아름답고 뜻있는 말인가. 그것은 원어보다도 더 훌륭한 번역이다.
필자가 우리말 안에 영어가 만연함을 안타까워 하는 것은 ‘외래어를 쓰지 말자’하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아니다. 아예 영어로 대화한다면 좋다. 그러나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영어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한국어 속에 박아놓고 쓰는 것은 사대주의도 아니고 그저 게으름일 뿐이다. 한 단어 한 구절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고심하는 어려움을 전문 번역가들은 잘 알 것이다. 게다가 있는 말로 번역이 불가능해서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더욱 더 어렵고, 인내심과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 없이 남의 것을 들여와 제대로 소화할 수는 없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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